[다른 방식으로 보기] 예술 작품을 보는 새로운 시각

iambob 2023. 6. 26. 22:55

제목 : 다른 방식으로 보기

지은이 : 존 버거

출판사 : 열화당



내 멋대로 쓴 <다른 방식으로 보기> 리뷰

우리는 예술 작품을 보러 미술관에 간다. 미술관 관람에 제한은 없다. 누구나 무료로 또는 소정의 비용을 지불하면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을 꼭 미술관에 가서 봐야 하는 건 아니다. 인터넷에 접속하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굳이 몇 시간씩 줄을 서지 않아도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언제든지 모나리자를 감상할 수 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으로 집을 꾸며 보는 건 어떨까. 우리 집은 나만의 미술관이 될 것이다. TV는 때론 도슨트가 되어 준다. 예술 작품을 소개하는 방송은 작가와 작품의 의미, 감상법 등을 심도 있게 다룬다.

이처럼 우리는 예술 작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감상할 수 있다. 예술 작품에 관심이 있으면 여러 경로를 통해 누구나 쉽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지금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예술 작품은 특권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특권층은 자신들이 가진 부와 명예, 권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예술 작품을 이용했다. 예술 작품은 주로 왕이 사는 궁전, 성당, 영주가 사는 성, 귀족이나 부를 축적한 상인의 저택에 전시되었다. 과거의 미술은, 특권을 지닌 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화(15쪽)되었다.

위대한 작품에 대한 일부 평론가의 평론은 나 같은 사람은 납득할 수 없는 온갖 미사여구로 가득 차 있다. 과거의 미술을 신비화하는 평론가의 언어는 보통 사람들과 예술 작품을 유리(遊離)시킨다. 그러나 보통 사람과 예술 작품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그들의 노력도 이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지금 예술 작품은 다양한 형태로 복제되어 우리의 일상에 파고들도 있다.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그 어떤 보호 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 이미지가 순간적이며, 도처에 존재하고, 실체가 없으며,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무가치하며,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39쪽)

서양의 예술 작품을 보면 벌거벗은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 우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의 알몸을 봐도 외설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으로 벌거벗은 몸이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64쪽) 꽁꽁 감추어 두었던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낼 때 우리의 성적 환상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하지만 누드는 벌거벗는 것과 결을 달리한다.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64쪽) 예로부터 서양의 예술 작품은 특권 계층, 그중에서도 남성에 의해 소비되었다. 자연스럽게 예술 작품은 남성의 니즈를 반영하게 되었다. 누드화는 그것을 보는 남자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려진 그림이다. (65쪽)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시선의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56쪽) 오늘날 누드는 좀 더 다양한 미디어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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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우리는 SNS를 이용한다. SNS에 신경 써서 올린 사진은 나를 돋보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러움에 찬 시선으로 날 볼 것이다. 사람들의 자랑질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이 사진이나 영상을 이용한다면 과거에는 예술 작품으로 자신을 과시했다. 서양의 유화 중에는 목적이 불명확해 보이는 그림들이 있다. 테이블 위에 온갖 음식이나 진귀한 물건을 올려놓은 그림인데, 그 물건들은 하나같이 보통 사람들이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유화를 보면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렇다면 화가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자신의 테크닉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건 아닌 듯하다. 화가는 생계를 위해 의뢰를 받은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만약 1500년부터 1900년 사이의 유럽 미술이 자본이라는 새로운 힘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는 지배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봉사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101쪽) 유화는 지배계급의 부와 명예, 권력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접근이 예술의 진정성을 더럽히는 것 같아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우고 있는 문화사에서는 그런 해석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을 더욱더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127쪽)

컬러사진이 발명되면서 과거 유화로만 가능하던 일을 사진이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유화가 그 그림을 소유하는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 것처럼, 컬러사진은 광고를 보는 구매자와 관계를 갖는다. 이 두 가지 매체는 그 이미지들이 보여 주는 실제의 사물을 획득했다는 느낌을 보는 사람에게 준다. (163쪽) 그러나 광고의 기능은 유화의 기능과 꽤 다르다. (164쪽) 유화는 지배계급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치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더욱 확고하게 갖도록 한다. 유화는 기존의 자기 자신이 좀 더 잘난 존재라고 느끼도록 해 준다. (164쪽) 그런데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만드는 데 있다. 사회 안에서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165쪽)


광고를 보면 내 삶이 초라해 보인다. 광고는 광고 속 제품을 소유하면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이에게 주문을 건다. 하지만 그 제품을 손에 넣어도 우리 삶은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는다. 광고는 말할 것이다. 구매해야 할 것이 아직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그걸 다 가져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광고를 보면 모든 희망이 한 데 모이고, 동질화되고, 단순화된다. 그렇게 모인 희망들은 정체불명이긴 하지만 강력하고, 물건을 살 때마다 반복되면서 마력적인 약속이 된다.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그와는 다른 종류의 희망이나 만족감 또는 쾌락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기대될 수 없다. (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