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저수지의 개들] 직접적인 묘사 없이 잔혹한 영화

iambob 2024. 9. 9. 09:00

제목 : 저수지의 개들 (1992)
감독 : 쿠엔틴 타란티노
출연 : 하비 카이텔(화이트 역), 스티브 부세미(핑크 역), 팀 로스(오렌지 역), 마이클 매드슨(블론드 역), 로렌스 티어니(조 역), 크리스 펜(에디 역)



<저수지의 개들> 리뷰


나는 겁쟁이여서 잔혹한 영화를 보지 못한다. 영화에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다. 피가 튀고 신체가 훼손되는 영화를 가급적 보지 않으려 하지만 아무리 피해도 의도치 않게 잔혹한 영화를 보게 된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나는 안절부절못한다. 손에서는 땀이 나고 가슴은 쿵쾅거린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실제처럼 느껴져 너무 끔찍하고 무섭다. 잔인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VOD나 OTT로 영화를 보다가 이야기으로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날 거 같으면, 나는 영상을 일시 정지하고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기분 전환을 할 겸 소파에서 일어나 먼 산을 한 번 쳐다보고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인다. 괜히 화장실을 다녀오고 물도 한 잔 마신다. 그리고 저건 진짜가 아니야,라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고 리모컨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잔인한 걸 보기 힘든 건 매한가지다.


영화에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나는 비록 잔인한 장면을 못 보지만 영화에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이유를 들자면.

  • 장르의 특성상 관객에게 긴장감이나 불안감을 부추기는 것을 지향하는 영화가 있다.(※ 위키백과) 공포, 스릴러, 누아르 같은 영화들인데, 이러한 영화 속 잔인한 장면은 영화에 긴장감과 불안감을 불어넣고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여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잔인한 장면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떤 영화는 폭력, 죽음, 고통 등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잔인한 장면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잔혹성, 광기 등을 표현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 이 외에도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려는 목적으로 잔인한 장면을 이용하기도 한다.

 

잔혹 영화는 신체가 훼손되어 피범벅이 된 모습을 상당히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살인, 고문 등의 폭력적 행위를 여과 없이 보여주곤 한다. 잔혹 영화 중 하나인 고어 영화는 다량의 피를 특징으로 하며, 신체가 잘려 나가거나 신체 내부의 장기를 외부로 드러내는 등의 표현을 통해 전율과 공포를 창출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런 부류의 영화는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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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어떤 영화는 잔혹함의 수위가 너무 과하다. 거부감 없이 잔혹 영화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는 더 자극적이고 더 사실적인 표현을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잔혹함을 극대화해서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 중에는 직접적인 상황 묘사 없이 잔혹함을 표현하는 영화가 있다. 이번에 본 <저수지의 개들>이 그런 예에 속한다. 이 영화는 신체 훼손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블론드’가 경찰에게 몹쓸 짓을 할 때, 카메라의 시선은 딴 곳을 향한다. 경찰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 수 없지만, 경찰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또렷이 들리기에 끔찍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블론드가 경찰을 칼로 난도질하나, 아니면 경찰의 피부를 벗기기라도 하나. 경찰의 귀가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우리는 경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


<저수지의 개들>의 블론드는 경찰에 앙심을 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잔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데 거침이 없다. 블론드의 성격, 그가 경찰에게 품고 있었던 감정은 그의 행동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에게는 보석을 훔쳐 떼돈을 버는 것보다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경찰의 귀가 잘린 걸 확인한 후 우리는 블론드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놈인지 깨닫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듯한 블론드의 태도는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우리는 블론드가 어디까지 악랄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마음 졸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단지 흥미를 유발하거나 도파민 분비를 목적으로 잔혹한 장면을 이용한다면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하지만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다면 거부감 대신 설득력을 얻는다. <저수지의 개들>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연출, 고통스러운 비명으로 잔인함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아주 잔혹하다. 블론드가 경찰에게 저지르는 짓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성격, 교도소에서 겪은 일을 고려했을 때 그의 행동에 아예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블론드가 경찰의 귀를 자르는 장면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겼다고 할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