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면도날
지은이 : 서머싯 몸
출판사 : 민음사
<면도날> 리뷰
시간은 연속적이어서 칼로 자르듯 재단할 수 없지만, 우리는 시대적 조류에 따라 시대를 구분 짓는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서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알아채기란 어렵다. 한 시대는 연극 무대의 커튼이 오르고 내리는 거처럼 시작되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 오랜 관습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새로운 문화는 자리를 잡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과도기에는 옛것과 새것이 뒤섞인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놓을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하면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엘리엇’처럼 기존의 질서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썩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그들이 일궈 놓고 향유해 왔던 것들을 잃을 수도 있어서다. 엘리엇은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목적한 바를 이룬 뒤에도 인맥의 유지나 관리에 소홀하지 않았다. 꾸준히 사교 모임에 참석해 얼굴을 비쳤고, 상류층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대접했다. 그가 상류 사회에 입성하려고 쏟아부은 돈과 시간 때문에라도 기존 질서는 무너지지 않고 오래 지속되어야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엘리엇이 동경하던 세상은 서서히 수명을 다해 간다. 엘리엇은 한 때 사교계의 트렌드 리더였지만 죽을 때쯤에는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고 만다. 뛰어났던 그의 안목은 빠르게 변하는 유행 탓에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되었고.
누군가는 새로운 시대의 추세를 따를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 미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될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모든 사람이 부를 축적할 기회를 잡으려고 애썼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이사벨’은 미래의 배우자가 남들처럼 살길 바랐다. 그녀는 남자라면 직장을 구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는다는 건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걸 의미했고 부자가 되는 길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사벨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직업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직업만 있으면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인데 취업하지 않겠다고 하니, 배우자로서 크나큰 흠결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랑만큼 돈도 중요했던 이사벨은 결국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반면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래리’는 1차 세계 대전 때 군에서 비행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전장에서 래리는 동료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 사건은 래리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다. 제대 후 래리는 신과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이는 돈이 되는 일과 거리가 멀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건 당시의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단순한 교환의 매개가 아니다. 돈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돈이 곧 기회였으므로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물질만을 좇는 삶은 래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 맞지 않았다. 래리는 오랜 시간 방황하면서 깨달은 세상의 이치를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자 했다. 래리의 인생에서 돈은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돈은 그저 안분지족 할 만큼만 있으면 되었다.
이들 말고도 <면도날>에서는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대공황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좌절하는 사람, 달라진 시대 덕분에 재능을 인정받고 꿈을 실현하게 된 사람, 정치적 이유로 망명 생활을 하는 사람 등등. 이야기 속 화자 ‘서머싯 몸’은 등장인물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가급적 중립적인 자세로 등장인물을 바라보려 한다. 소설 속 몇몇 인물은 기회주의적이고 속물 같다. 하지만 등장인물을 대하는 몸의 태도 때문에 그들에게 가졌던 편견은 사라진다. 비록 그들의 행동에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는 갔다.
몸은 등장인물에게 제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곤 한다. 그것이 마치 정답이라도 되는 양.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그 방식도 구식이 되고 만다. 인생에 정답이 있을까. 래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한다. 래리처럼 우리도 죽을 때까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고비이다. 시련에 부딪쳤을 때, 가혹한 현실에 굴복하고 스러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각자의 방식대로 고난을 헤쳐나간다. 인생에 정답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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