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라이프]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

iambob 2024. 9. 22. 15:42

제목 : 리틀 라이프 1, 2
지은이 : 한야 야나기하라(권진아 옮김)
출판사 : 시공사




<리틀 라이프> 리뷰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사건은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 심각한 트라우마는 공격적 성향, 충동조절 장애, 우울증, 약물 남용 등의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집중력 및 기억력 저하 같은 인지기능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와 상담하거나, 명상 또는 요가를 통해 스트레스와 불안을 완화하고, 가족 · 친구 · 동료와 소통하며, 충분한 수면 · 규칙적인 운동 · 균형 잡힌 식사를 통해 신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 글들에 따르면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의 첫걸음처럼 보인다.


그런데 예전에 겪었던 충격적 사건이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가 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할까. <리틀 라이프>의 ‘주드’는 가혹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드는 나쁜 어른의 꼬임에 넘어가 수없이 많은 남자에게 몸을 팔아야 했다. 나쁜 어른의 구렁에서 벗어난 뒤에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매춘을 했다. 그 시절 주드는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게 매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미친 인간은 주드를 비극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 사람은 주드를 감금하고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 주드를 차로 들이받아 불구로 만들어 버렸다. 어린 시절 겪었던 일들은 주드에게 트라우마뿐만 아니라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주드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말할 수 없다. 자신의 어린 시절은 평범한 것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드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도 그러한데 다른 사람은 오죽하랴. 주드는 자신의 과거를 알고 나면 누구나 자신에 대해 선입견을 품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주드는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대신 꼭꼭 숨기기로 한다.


주드의 삶은 성인이 된 후 정반대로 흘러간다. 그는 성공한 변호사가 되어 남부러운 것 없는 삶을 산다. 하지만 무너져 버린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과거의 망령은 주드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주드의 어린 시절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주드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견뎌내기 위해 자해를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는 자해를 멈추지 않는다. 주드의 자해는 습관이 되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날이면 그는 어김없이 자해를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자해는 주드의 인생을 잠식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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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타인의 불행을 가십거리처럼 소비한다. 그리고 때때로 남의 일에 주제넘게 이래라저래라 한다. ‘제발 전문가 도움을 받아!!’ 주드가 자해할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실제로 내가 주드의 친구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생각은 회의적으로 변했다. 그동안 나는 대수롭지 않게 남에게 충고나 조언을 했다. 내 인생이 아니다 보니 방관자처럼 남의 인생을 바라보았다. 나는 당사자에게 닥친 문제의 깊이는 알지도 못 한 채 같잖은 충고나 조언으로 남의 인생에 개입했다. 남의 인생에 제멋대로 발을 들여놓았으면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의무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책임을 회피했다. 주드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일을 당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주드 같은 사람에게 충고나 조언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그 원인을 마주 봐야 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트라우마의 원인이 자존감과 관련되어 있다면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게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때 주변의 도움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주드 곁에는 무한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사람이 여럿 있지만, 그들은 지켜보는 것 말고는 주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고마운 것과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드러내는 건 별개이기에 주드는 사람들에게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다. 주드는 전문가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는다. 당사자가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면 전문가라 할지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주드의 과거는 이야깃거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다. 이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상대방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했고, 관심을 빙자하여 남의 인생에 지나치게 개입하려 했다. 나는 내 무책임한 행동이 상대를 더 고통에 빠뜨릴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원치 않는 관심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간섭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치부를 건드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상대방이 먼저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놓지 않는 이상 굳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야 한다. 관심과 공감은 당사자가 원할 때 그 힘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