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은이 : 룰루 밀러
출판사 : 곰출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이 책의 저자는 학창 시절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 그 일로 그녀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심지어 자살까지 시도했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 한 남자를 만나면서 그녀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녀와 남자 친구는 꽤 오랜 시간 사귀었다. 그 남자라면 인생의 동반자로서 기꺼이 미래를 함께 그려나갈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그건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그녀는 안식처가 되어 준 남자 친구를 두고 어떤 금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금발의 소녀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우생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동성을 사랑하는 저자는 부적합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때가 어느 땐데 우생학 운운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우생학의 망령은 아직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분류학자,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학장이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열광적인 우생학 옹호론자였다. 스탠퍼드 대학에는 최근까지도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었다. 노벨상 수상자를 숱하게 배출한 명문 사학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이론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을 생각 없이 기리고 있었다.
1927년 4월 미국에서는 범죄와 질병, 가난, 고통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우생학 불임화법을 만들었다. 이 법으로 인해 부적합자를 불임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1970년대까지 강제 불임화 수술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이후 이 법은 유명무실해졌으나, 여전히 많은 주에서 ‘부적합’을 ‘정신적 결함이 있는’이라는 표현으로 살짝 바꿔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불임화 수술을 허용하고 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캘리포니아주 교도소에서는 15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동의도 얻지 않고 때로는 본인들도 모르게 불법적으로 불임화 수술을 자행했다. 2017년 여름에는 테네시주의 어느 판사가 잡범들에게 불임화를 받는 대가로 수감 형량을 줄여주겠다고 제안한 것이 드러났다. (193쪽~196쪽)
과거와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 가난과 고통과 범죄가 혈통의 문제이며 칼로 잘라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이 나라(미국)에서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미국)는 우생학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나라다. (196쪽)
우생학은 1883년 유명한 박식가이자 찰스 다윈의 고종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이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만든 단어다. <종의 기원>을 통해 지구에서 생물의 배열을 결정하는 자연선택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골턴은 인류의 지배자 인종을 선별할 수 있도록 그 힘을 조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요컨대 가난, 범죄, 문맹, “정신박약”, 방탕함 등 그가 혈통과 관련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특징들을 교배함으로써 말이다.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는 이 기술을 “우생학”이라고 불렀다. (181쪽)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골턴의 생각을 제일 먼저 미국으로 들여온 이들 중 하나다. (182쪽)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우생학이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던 거 같다. 그는 모든 생물에 등급이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관찰하는 생물에게서 도덕적 교훈을 찾으려고 했다. 한 과학 논문에서 그는 멍게가 한때는 고등한 물고기였지만 “게으름”, “무활동과 의존성”이 더해진 결과 현재와 같은 형태로 “강등”된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한 쇠퇴를 초래한 정확한 메커니즘은 알지 못했지만, 데이비드에게 멍게는 명백한 경고이자 게으름에 대한 교훈담이고, 말 그대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주머니였다. (74쪽)
데이비드의 인생은 노력, 끈기, 열정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는 몇 번의 불행한 사고를 겪었다. 그 사고는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절대 좌절하지 않았다. 포기를 모르는 타고난 성품 덕분인지 그는 언제나 좌절을 딛고 일어섰다. 그가 살아온 방식, 성품 등은 우생학을 퍼뜨리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밀어붙였다. 자선과 호의가 부적합자를 양산한다고 믿었던 데이비드는 자선의 위험성을 알리는 책을 썼고(181쪽), 순회 연설을 다니며 자선이 “부적합자 생존”이라는 위험을 유발한다고 경고했으며(183쪽), 학생들에게 “빈곤”과 “타락” 같은 특징들이 유전될 수 있다고 가르쳤고(183쪽), 꾸준히 우생학을 지지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우생학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데이비드는 강제적인 우생학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더 강력히 밀어붙였다. 그는 돈 많은 과부를 설득해 우생학기록보관소(ERO)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기부하게 했다. ERO는 미국인 수만 명의 데이터를 수집한 다음 그 정보를 활용해 가난, 범죄성, 방탕함, 부정직 등이 미리 정해진 채 핏속에 흐르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가계도를 만들었다. (190쪽) 그리고 1927년 4월, ERO의 과학자들은 연방대법원에 “도덕적 해이”가 피에 부호화되어 있으며 강제 불임화로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증거를 제출함으로써 우생학 불임화법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쪽)
자신의 영향력을 우생학을 전파하는 데 이용했던 데이비드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바란 대로 수많은 사람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았고 우생학의 잔재는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채 미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데이비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이대로 끝났더라면 너무나 답답했을 텐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난다. 부적합자라는 낙인이 찍혀 낙오자로 살 뻔했던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들 만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분기학에 따르면 ‘어류’라는 말은 물속 생물들의 진화적 특성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고 한다. 데이비드가 산과 바다로 열과 성을 다해 찾아 헤맸던 물고기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대로라면 데이비드가 평생 쌓아 올린 업적은 뻘짓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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