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글쓰기의 시작

iambob 2024. 3. 6. 17:05

제목 : 단순한 열정

지은이 : 아니 에르노

출판사 : 문학동네



내 멋대로 쓴 <단순한 열정> 리뷰

글쓰기는 어렵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당장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글은 쓰고 싶은데 마땅히 쓸 게 없어서 나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상을 써 보기로 했다. 쓸 게 생겼으니 이제 글을 술술 써 내려가면 될 터.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글감은 생겼는데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은 많은데 그걸 옮겨 적을 수 없었다. 글을 쓸 때 나는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다.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단어들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거대한 벽에 부딪힌 나는 같은 말만 썼다 지웠다 반복할 뿐이다.

글쓰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그 글이 내 이야기가 아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일기를 쓰던 때는 지금과 달랐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나날을 보냈지만, 그때는 매일 일기장에 뭔가 적을 게 있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쓸거리는 충분했다. 비슷해 보이는 하루하루라도 떼어놓고 보면 미묘하게 다른 하루하루였다. 일기가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을 적는다면 감상문은 보고 느낀 바를 쓴다. 감상문은 기억에 의존해서 쓸 수밖에 없는데,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는 내 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단순한 열정>의 화자도 이점을 지적한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26쪽)

일기를 쓸 때 귀찮기는 했어도 힘들지는 않았다. 경험했던 일을 글로 써서 그랬나 보다. 그러나 감상문을 쓸 때는 작품의 내용과 주제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계속 되묻게 된다. 생각이 길어질수록 머릿속은 뒤죽박죽되었고, 내 생각에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단순한 열정>의 글쓴이는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쓴다. 글쓴이는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의 머릿속은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무언가에 열중하면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한다. 글쓴이도 마찬가지다. 글쓴이는 남자에게 온 정신을 쏟는다. 글쓴이가 남자에게 정신이 빼앗긴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남자는 글쓴이와 국적이 다른 데다 심지어 유부남이다. 글쓴이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중인데, 글쓴이가 원한다고 해서 남자를 그때그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이 그러니 글쓴이는 늘 애달플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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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이 글을 쓰게 된 목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10쪽)

글쓴이는 자신이 처한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감정의 기복을 보인다. 글쓴이는 사실에 따라 자신의 감정 변화를 글로 표현한다. 글쓴이가 심리 묘사에 치중함으로써 이 글은 사랑의 열정에 불타오른 글쓴이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글쓴이가 의도적으로 감정을 부각한 결과 남녀의 부적절한 관계는 이 글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되었다. 다만 글쓴이가 어떠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느냐가 중요할 뿐.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난다. 글쓴이에게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된 순간이 바로 그때이다. 사랑을 하면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끼게 된다.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그때가 어찌 보면 인생에서 가장 소설 같은 순간이 아닐까 싶다. 소설의 구성 단계처럼 사랑에도 단계가 있다면 글쓴이는 지금 사랑의 위기, 절정 단계를 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쓴이는 거두절미하고 그 부분만 떼어내 자신의 상태를 글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마음속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감정을 효과적 전달하기 위해 군더더기를 뺐더니 글쓴이의 열정만 남게 되었다.

일기는 매우 사적인 글이다. 하지만 일기 검사를 받아야 했던 그 시절, 나는 누군가 읽을 거라는 가정하에 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일기를 쓰려면 여러 가지 물리적 제약이 따랐다. 그 제약을 극복하고 상대에게 내 글을 보여 주기 위해선 내가 처한 상황을 취사선택해서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했다. 글쓰기의 출발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