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불편한 진실에 침묵하지 않기

iambob 2024. 4. 23. 09:00

제목 : 이처럼 사소한 것들

지은이 : 클레어 키건

출판사 : 다산책방



<이처럼 사소한 것들> 리뷰

내 삶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닌데 그냥 지나치기에는 기분이 왠지 찜찜한 그런 일들이 있다. 그런 일을 마주쳤을 때 모르는 체하고 넘어가는 게 나을까, 남의 일이라 생각지 않고 발 벗고 나서는 게 나을까. 나는 나서지 않고 침묵하는 편이다. 내향적인 성격이라 어려서부터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런 일에 침묵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 생각하고, 그런 일에 휘말리면 골치 아픈 일을 겪을 공산이 크며, 나와 달리 언제나 앞장에서 발 벗고 나서는 사람 한 둘 정도는 있기에 나는 웬만하면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껄끄러운 일은 회피하고 보는 나의 심리는 방관자 효과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방관자 효과는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방관자 효과가 사람들에게 주목받은 건 1964년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제노비스라는 28세 여성이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등을 칼에 찔린 제노비스는 소리를 질렀고, 그때 누군가 아파트 창문을 열고 그러지 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거리로 나와 제노비스를 도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소리에 놀라 도망쳤던 괴한은 아무도 거리로 나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다시 제노비스를 공격했다. 괴한은 제노비스를 칼로 여러 차례 더 찌르고 돈을 빼앗아 달아났다. 괴한이 제노비스를 공격하고 달아날 때까지 35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제노비스가 죽어 가는 걸 목격한 사람은 무려 38명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심리학자 빕 라타네는 제노비스를 돕지 않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그는 실험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는 실험에 참가하러 온 사람을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게 한 뒤, 대기실 통풍구를 통해 연기가 새어 들어가게 했다. 2, 3분이면 방 안이 연기로 가득 찰 정도의 양이었다. 이 실험에서 빕 라타네는 실험 참가자가 연기가 난다는 걸 인지하고 연구 팀에게 알리러 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측정했다.

실험 결과, 대기실에 혼자 앉아 있던 참가자의 75%가 2분 이내에 연기가 난다고 신고했다. 그런데 대기실에 여러 명이 함께 있으면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신고를 하러 오는 참가자의 비율이 낮아졌고, 신고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길어졌다. 이런 현상은 대기실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심해졌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실험 참가자들이 이기적이어서 그렇게 행동한 거 같지는 않다. 진짜 불이 나서 연기가 나는 거라면 바로 신고를 해야 옳다. 이는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가자들이 연기가 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빕 라타네는 그 이유를 사람들이 남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서 찾았다. 남들이 가만히 있는데 나만 방을 나서면 사람들이 공연한 일로 호들갑 떤다고 여길 테고, 괜히 면박당할 바엔 차라리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제노비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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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 효과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비겁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동안 내가 껄끄러운 일에 눈감고 있었던 것도 다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변에 나 같은 사람만 득시글거린다면 왠지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답답한 기분이 들 거 같다. 사람들은 관성에 젖어서 남의 잘못을 보고도 모르는 체하고만 있을 것이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에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이 사회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 관심이 무슨 힘이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때때로 변화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주인공 ‘펄롱’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펄롱은 마을 사람들에게 석탄, 장작 따위를 내다 파는 일을 한다. 어느날 그는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뜻밖의 장면을 목격한다. 우연히 수녀원의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과 마주쳤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착취와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그 일은 펄롱의 뇌리에 각인되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가 수녀원에서 보았던 것을 무시할 명분은 충분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그 또한 수녀원과 척지고 살아서 좋을 게 없었다. 수녀원은 그의 주요 거래처 중 한 곳이었고 마을에 수녀원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펄롱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자칫 아이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펄롱의 아내 ‘아일린’의 말마따나 나와 상관없는 일에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 불황의 터널 속에서 생때같은 자식들을 건사하려면 진실 앞에서 침묵할 줄도 알아야 했다. 펄롱의 관심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이다. 게다가 펄롱이 불편한 진실에 침묵하지 않을 경우 수도원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게 될 게 뻔했다. 그러나 펄롱은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소시민에 지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힘도 없고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많았지만, 펄롱은 수녀원의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기로 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싸움이 되더라도 침묵하지 않는다면 아주 사소한 곳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될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