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판을 타고] 책임의 부재

iambob 2022. 10. 24. 12:28

제목 : 해적판을 타고
지은이 : 윤고은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내 멋대로 쓴 <해적판을 타고> 리뷰

어렸을 때, 형제와 다툼이 있으면 엄마는 책임을 추궁하셨다. 엄마는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둘의 이야기를 공평히 들으시고 판결을 땅 땅 땅 내렸다. 엄마가 한 사람의 손을 번쩍 들어주면 잘못한 쪽이 사과하고 형제애를 뜨겁게 나눈 뒤 서로 화해하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목청 높여 자기가 잘했다고 우기기 바빴다. 엄마는 오은영 박사님이 아니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난감해하셨다. 둘의 주장이 다 그럴듯해 한 사람 편을 들어주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꽥꽥 소리 지르는 게 듣기 싫으셨던 엄마는 손위 형제를 불러내, 네가 나이가 많으니까 참아라,라고 말하며 문제를 유야무야 덮어 버렸다.

왜 싸웠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로 다퉜을 것이다. 나는 공연히 고집을 부려 일을 크게 만들곤 했다. 사안의 경중을 따져 본 엄마가 날 더 꾸지람할 거 같았다. 그래서 더 기를 쓰고 이기려 들었다. 말이 쉽지, 잘못을 인정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하면 왠지 덤터기를 쓸 거 같고,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나는 엄마의 추궁이 들어오면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를 먼저 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책임의 무게가 무겁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별것 아닌 일을 크게 만든 장본인이 되는 게 싫어서 늘 변명하고, 상대방 탓을 했다. 책임의 무게를 알았다면 말, 행동, 선택을 신중히 했을 텐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책임감에 대해 배운다. 자기가 어지른 건 자기가 치우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해보라고 아이에게 말한다. 엄마는 날 꾸짖으면서 변명하지 마라, 남 탓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빅 피처를 그리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식을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겠지. 하지만 엄마의 잔소리는 내 마음속에 책임의 중요성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책임지는 사람이 별로 없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까지 한다. 아이들은 어른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 그런데 저런 어른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과연 커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중대 재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게 아니다. 크고 작은 사고가 쌓이고 쌓여 중대 재해로 이어진다. 큰 사고에 대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 책임자는 수수방관하다 일을 크게 만든다. 재해를 일으킨 곳은 뒤늦게 피해 보상과 사고 방지를 위한 대책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미 억장이 무너져버린 가족들의 슬픔을 달래기엔 역부족이다. 사고 수습이 이루어지고 경찰, 검찰이 한동안 수사를 요란하게 벌인 다음 내놓는 결과는 현장 감독자 처벌이다. 그러한 사고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 제공자는 늘 한발 물러서 세상이 잠잠해지기를 숨죽여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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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에서의 갈등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 ‘유나’의 아빠가 다니는 회사에서 토끼가 비소에 오염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회사는 사고를 은폐하기 위한 적절한 장소를 물색 중이었고 하필이면 유나 집 마당이 당첨되고 만다. 회사는 조만간 토끼를 퍼갈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가족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약속은 차일피일 미뤄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사고 당시 책임자가 바뀌면서 마당에 묻힌 토끼는 유나 가족만의 골칫거리가 되고 만다. 난데없이 골칫거리를 떠안게 된 유나 가족은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책임자의 책임 회피는 애꿎은 피해자를 양산한다. 비소 토끼가 땅에 묻힌 후 유나네 마당에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슈퍼지렁이가 나타났고, 채송화는 새순이 돋아나지 않았으며, 배롱나무는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았고, 마당에 심은 양파는 비정상적으로 컸다. 토양 검사는 정상이었지만, 마당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유나 가족에게 마당은 추억이 깃든 소중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이사를 가는 수밖에. 한편, 사건이 공론화되자 엉뚱한 책임자가 나타난다. ‘루‘는 회사에서 배출되는 폐기물을 관리했다. 사건이 점점 커지자 그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권력 앞에 개인은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내부 고발자의 제보로 어떤 조직의 구조적 문제가 외부에 공개될 때가 있다. 내부 고발자는 자신의 제보가 문제 개선의 실마리가 되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끝나고 만다. 내부 고발자는 미운털이 박혀 반강제로 조직에서 쫓겨난다. 유나의 아빠는 마당에 묻힌 비소 토끼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회사를 고발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무슨 짓을 해도 꿈쩍 않는 거대한 벽 앞에 개인은 무기력하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세상사라 했던가. 비소 토끼는 뜻밖의 국면을 맞이한다. 유나 집 주변에서 희귀 몬스터 ‘지롱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람들이 유나가 살던 동네로 모여든다. 시작은 막내 ‘민호’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슈퍼지렁이였다. 그걸 본 동네 할머니가 낙서를 지워달라고 구청에 신고했고 구청에서는 그림이 재밌다며 홍보용으로 쓸 생각을 했고 게임 회사까지 그 그림에 관심을 보이면서 일은 일파만파 커진다. 우연이 겹치고 겹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릴 거 같았던 회사의 만행은 세상에 알려진다. 뜻밖의 우연이라도 찾아와야 무책임한 사람들이 마지못해서 잘못을 뉘우친다는 사실이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