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갑자기 들이닥쳤지

iambob 2023. 3. 7. 13:04

제목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2022)

감독 : 에드워드 버거

출연 : 펠릭스 카머러(파울 보이머 역), 알브레히트 슈흐(스타니슬라우스 카친스키 역)



내 멋대로 쓴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리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넘었다. 금방 끝날 거라던 전쟁은 장기화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2월 15일 기준, 우크라이나에서 사망한 국민은 최소 8,006명, 부상자는 최소 13,287명에 이른다고 한다. 1,9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발생했고 수많은 군인이 죽거나 다쳤다. 우크라이나군 사상자는 약 10만 명, 러시아군 사상자는 2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쟁이 끝나지 않고 지속된다면 앞으로 더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나올 것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1조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거라고 한다.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지만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피해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전쟁의 여파로 식량,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물가가 치솟았다. 이에 각국 정부는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긴축정책을 펼쳐야 했고 세계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이 전쟁은 뭐 하나 득 되는 게 없다. 러시아는 생각만큼 많은 땅을 차지하지 못했고 서방의 제재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으로 무고한 국민이 고통받고 있다. 또한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세계 경제는 뒷걸음치고 있다.

득 보다 실이 많아 보이는 이 전쟁의 시작엔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이 있다. 이번 전쟁은 그의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자국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걸로 봐서 푸틴은 정치적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고집을 꺾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치러야 하고,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고, 국민을 계속해서 사지로 내몰아야 한다는 걸 감안했다면 이쯤에서 전쟁을 멈췄을 것이다. 결국 지도자의 그릇된 선택으로 피해를 보는 건 애꿎은 국민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시간을 되돌려 보면 1917년 독일 서부 전선에서의 전투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든 1917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독일 서부 전선에서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1914년 10월에 전쟁 발발 직후, 서부 전선의 전투 양상은 참호전으로 굳어졌다. 1918년 11월 종전 무렵 전선의 이동은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300만 명이 넘는 병사가 사망했으며 대개는 고작 몇백 미터 땅을 차지하려는 전투에서였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대략 1,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면 죽을 게 뻔한데도 명령이 떨어지면 병사들은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적을 향해 돌격한다. 기적처럼 적의 진지에 도착한 사람이 많은지, 총 한 번 쏴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버린 사람이 많은지 알 순 없다. 영화를 보면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아 보이던데. 서부 전선에서만 300만 명이 넘는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격전이 벌어질 때마다 무수히 많은 병사가 사망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그런데 힘들게 차지한 그 땅이 300만 명의 젊은 병사들이 목숨을 바칠 만큼 값어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사람 목숨과 땅 크기가 비례할 순 없지만,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거 치곤 결과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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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한 싸움이 지속된 건 결국 권력자의 그릇된 판단 때문이다. 독일의 장군은 뚜렷한 성과 없이 사람만 죽어 나가는데도 전쟁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 그는 휴전 협정 시간이 임박해 오는데도 병사들을 전장으로 내몬다. ‘카트’는 ‘파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개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면 뼈다귀를 물어뜯지. 인간에게 권력을 주면 그 인간은 짐승이 돼.”

일반 병사가 추위와 배고픔 속에 흙탕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말라비틀어진 빵으로 허기를 달랠 때, 독일의 장군은 벽난로의 온기가 도는 곳에서 와인을 마시고 스테이크를 썰며 먹다 남은 고기를 키우는 개에게 던져준다. 애초에 권력자에게 병사의 안위 따위는 관심이 없었는지 모른다.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독일과 프랑스의 결정권자들은 서로 주판알을 튀기기 바쁘다.

여기의 모든 건 열병 같아.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갑자기 들이닥쳤지. 우리도 원하지 않았고 저쪽도 원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이러고 있잖아. 세계의 절반이 이러고 있어. 우리가 서로를 도륙하는 동안 신은 지켜보기만 해.”

카트의 이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전쟁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꿈을 짓밟는다. 권력자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국민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국민은 누굴 믿어야 할까. 전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신마저 자신을 외면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권력자는 사람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따라서 권력자에게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들이 가진 힘을 올바로 쓰지 않으면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사상자 수를 집계해서 발표한다. 그런데 그 숫자는 개개인이 겪는 고통을 보여주지 않는다. 숫자에는 감정이 없다. 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안전한 곳에서 종이에 적힌 숫자를 보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참모의 보고를 들을 것이다. 감정이 배제된 숫자는 권력자에게 사상자들의 고통을 전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권력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의 목숨만큼 개개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