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안해요, 리키] 늪에 빠진 리키

iambob 2023. 2. 20. 14:21

제목 : 미안해요, 리키 (2019)

감독 : 켄 로치

출연 : 크리스 히친(리키 터너 역), 데비 허니우드(애비 터너 역)



내 멋대로 쓴 <미안해요, 리키> 리뷰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도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 있는 거 같다. <미안해요, 리키>의 주인공 리키 터너는 택배 기사다. 건설 현장에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던 리키는, 일용직도 더는 못 해 먹겠다 싶어, 택배 기사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리키는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하며 택배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상황이 악화한 뒤다. 리키는 발을 빼기엔 너무 늦었음을 느낀다.

 

택배 기사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이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들이 맺는 계약의 외형은 도급 위임계약이거나 이와 유사한 계약이지만, 계약의 존속과 실질적 전개 과정에서 보이는 종속성은 일반 근로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즉, 이들은 자신이 직접 노무를 제공하며 경제적으로도 사업주에게 의존돼 있어 실제적으로는 근로자와 차이가 없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3667&docId=931771&categoryId=43667) 대리점 관리자는 리키에게 말한다. 택배 기사는 고용계약을 맺지 않는 개인 사업자라서 실적도 없고 출근 카드를 찍을 필요도 없다, 임금 대신 배송 수수료를 가져가기 때문에 일한 만큼 벌어간다고.

 

관리자의 말만 들으면 택배 기사란 직업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실상은 생각했던 것과 매우 다르다. 택배 차량 같은 경우, 회사 차를 빌리든지 자기 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회사 차를 빌리면 회사에 큰 액수의 렌트비를 줘야 해서, 리키는 그 돈을 줄 바에 차라리 차를 사기로 한다. 근데 리키는 대출이란 대출은 다 당겨 써서 돈 나올 구석이 없다. 결국 그는 아내의 출퇴근 차를 팔아서 택배용 밴을 구입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리키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찻값 정도는 금방 만회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 법. 회사는 각종 벌금과 벌점으로 리키를 옥죈다.

 

관리자는 배송 시작 전 리키에게 위치 추적이 되는 단말기를 내어준다. 고가의 장비니 잃어버리지 말라며. 신통방통하게 배송 경로도 짜주는 그 기계로 물건을 스캔해서 차에 실으면, 리키는 책임지고 고객의 집까지 배송해야 한다. 정확 배송물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정된 시간 안에 배송해야 한다. 손바닥만 한 기계의 통제 아래 리키는 택배를 시작한다. 단말기가 가라는 데로 가서 고객에게 물건만 건네주면 되니 그 일이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택배란 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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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는, 일이 익숙지 않은 초창기에는 불법 주차 딱지를 떼일 뻔하기도 하고 고객이 요청한 장소에 물건을 갖다 놓다가 개에게 물릴 뻔하기도 한다. 배송 도착 시간은 점점 리키의 숨통을 조여 온다.  제시간에 배송하지 않으면 벌점을 받기 때문이다. 택배 기사의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줄 알았던 단말기는 리키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장시간 이동하지 않거나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면 경고음을 울려댄다. 부득이하게 회사를 쉬어서도 안 된다. 쉬려면 대체 기사를 구해야 한다. 보험 가입 대상 제외 물건을 분실할 경우 거액의 돈으로 물어내야 하고, 단말기도 워낙 고가라 절대 망가뜨리거나 분실해서는 안 된다.

리키는 주 6일, 하루 14시간씩 일한다. 그는 매일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잠이 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건 꿈도 못 꾼다. 간병인으로 일하는 아내라고 시간이 남아도는 게 아니다. 차 없이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느라 아내 역시 늘 시간에 쫓긴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아이들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다. 초등학생 딸은 불안 증세를 보이고 사춘기 아들의 방황은 날로 심해져 간다. ‘세브’는 학교를 빼먹고 학교에서 싸움질을 하고 심지어 도둑질까지 한다. 자신은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데 아들은 말썽만 피우니, 리키는 도저히 세브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다.

리키는 정말 열심히 일한다. 열심히 일을 했으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뒤따라야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리키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하기만 한다. 택배 기사를 시작한 이후, 리키의 삶과 가족 관계는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뭔가에 쫓기듯 살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고 가족에게 이해를 구하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도 당한다. 배송 중 강도를 만나 크게 다치고 택배 상품을 빼앗긴 데다 단말기까지 파손된다. 리키가 회사에 물어내야 할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심지어 회사는 다쳐서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 대체 기사를 구하라고 다그친다.

내가 편리하면 할수록 다른 누군가는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아침 일찍 고객의 문 앞까지 물건을 가져다 놓기 위해 택배 기사는 밤잠을 설쳐야 한다. 고객에게 제 시간 안에 빨리 물건을 가져다주느 라택배 기사는 밥 먹을 시간, 화장실 갈 시간도 모자란다. 택배 회사는 고객의 편익을 증진하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투자를 늘리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다. 그런데 택배 기사의 복리 후생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에게 제공된 편리가 누군가의 피, 땀, 눈물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