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iambob 2023. 2. 25. 15:43

제목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6)

감독 : 변성현

출연 : 설경구(한재호 역), 임시완(조현수 역)



내 멋대로 쓴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리뷰

인간관계는 나이 들수록 더 복잡해지는 거 같다. 뭐가 그리 신경 쓸 게 많은지. 얼마 전 배우 임시완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이 눈치가 없는 편이라고 말하는 걸 보았다. 선배가 인사치레로  말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나 어떻다나. 그가 선배에게 밥 먹자는 연락을 하면 선배들은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인다고도 했다. 사실 나도 궁금하다. 진짜 밥을 먹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왜 밥 한번 먹자,라고 말하는 걸까. 지키지 않을 약속이라면 예의상이라도 하지 않은 게 나을 거 같은데 말이지. 사람들은 그 외에도 조만간 보자, 예뻐졌다, 전화할게. 같이 별 뜻 없는 이런저런 인사치레를 주고받는다.

예의상 건네는 이런 말들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가뜩이나 복잡한 일도 많은데 신경 쓸 일 하나가 늘어난 것과 다름없다. 먼먼 옛날, 친구와 한참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나 많은 대화를 나눴건만, 친구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날 친구는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 후로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고, 나는 다시 전화한다는 말이 그 친구의 인사치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찌 보면 임시완이 잘 한 건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당황할지언정, 대화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튼, 대화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선 그 당시 상황, 분위기, 행간 등을 두루 살펴야 한다. 밥 한번 먹자, 라는 말에 헤아릴 게 이다지도 많아질 일인가.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렇게 친분이 있는 건 아니라 치자.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고 상대방이 헤어질 때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말한다면, 이건 인사치레일 가능성이 높다. 그냥 한번 해 본 소리에 언제 먹는 게 괜찮겠냐고 약속을 잡으려 든다면 상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가능성이 높다. 임시완은 그날 방송에서 그동안의 일을 토대로 나름 터득한 바를 들려주었다. 상대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하면 인사치레, 손을 마주 잡거나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면 진심이라고.

나는 가끔 대화할 때 상대의 저의를 의심하곤 한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을까, 곰곰이 곱씹어 본다. 상대방은 별 뜻 없이 말했을 것이다. 근데 나 혼자 왜곡해서 생각하고 오해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운다. 상대방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불안감 때문인 거 같다. 상대가 거짓말로 날 속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런 생각이 들면 나는 그날의 대화를 두 번, 세 번 되새겨 본다. 속고만 산 것도 아니건만, 그러고 살고 있다. 어렸을 땐 이것저것 따져가며 대화하지 않았는데, 어른이 된 나는 왜 사람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세상에 찌들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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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믿음을 저버린다. ‘한재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게 못마땅한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 ‘고병철’은 한재호를 경계한다. 경찰인 ‘조현수’는 범죄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재호에게 접근한다. ‘조현수’가 경찰이란 걸 알아챈 한재호는 조현수의 엄마를 죽인다. 마약수사대 총경 ‘천인숙’은  조현수의 어머니의 죽음에 한재호가 개입된 걸 알면서도 조현수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인물인 ‘고병갑’은 비주얼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한재호는 조현수에게 말한다.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으라고.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상대방이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로 믿지 못한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다들 꿍꿍이가 있으니 상대를 믿지 못하는 걸 테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참 피곤하게 산다. 언제 뒤통수 맞을지 모른단 생각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간다. 이들이 상대의 진심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참으로 극단적이다. 거슬리니까 죽여버리고, 가학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으며, 상대방에게서 가장 소중한 걸 빼앗는다. 이들 세계에서는 상대를 속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세상이 변해서, 남을 잘 믿는다는 건 순진한 거고,  순진하다는 건 착한 거고, 착하면 남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다는 뜻이 되었다. 조현수는 비록 의도를 가지고 한재호에게 접근했지만, 나중에 자신이 경찰임을 솔직하게 밝힌다. 한재호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줬기 때문이다. 자기가 경찰임을 솔직하게 밝힌 현수를 보며 재호는 현수가 믿을 만한 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천인숙은 범죄 조직 소탕에 눈이 멀어 작전에 방해가 되는 정보라면 그 어떤 것도 현수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결국 현수는 나쁜 놈들 농간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만다.

현실은 어떨까. 영화처럼 나쁜 놈들만 착한 사람을 이용해 먹는 건 아니다. 착한 사람이 베푼 호의를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게 무례한 부탁을 하고 착한 사람과의 약속을 가벼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엔 많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착한 사람들은 늘 손해를 보는 기분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조카는 다르다. 조카에게는 얄밉게 구는 친구가 하나 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그 친구는 못됐다. 하지만 조카는 그 친구의 단점보다 장점을 본다. 그렇다고 조카가 손해를 보는 거 같진 않다. 심심하게 있는 것보단 친구와 재밌게 노는 게 좋아서 때론 다투기도 하지만 그 친구와 사이좋게 지낸다. 조카는,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대화의 진의를 파악하고 상대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가려내느라 피곤하게 사는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