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사서독 리덕스] 상실의 아픔

iambob 2025. 2. 9. 08:00

제목 : 동사서독 리덕스 (2008)

감독 : 왕가위

출연 : 장국영(구양봉 역), 양가휘(황약사 역), 임청하(모용언 / 모용연 역), 양조위(맹무살수 역), 장학우(홍칠 역), 장만옥(자애인 역)



<동사서독 리덕스> 리뷰

영화 <동사서독 리덕스>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다.

‘구양봉’은 ‘자애인’이라는 여인을 사랑했다. 그러나 자애인은 구양봉이 아닌 그의 형과 결혼했다. 구양봉은 고향을 떠나 홀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는 그녀를 잊기 위해 자기 일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녀를 잊으려고 할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Daniel Wegner)는 이런 심리 작용이 궁금해 1987년에 실험을 실시했다. 다니엘 웨그너는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실험을 실시했는데 A그룹에게는 흰곰을 생각하라 지시했고 B그룹에게는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 그룹들은 흰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는 지시를 받았다. 종을 친 횟수가 많은 그룹은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B그룹이었다. (#백곰 효과) ‘백곰 효과’로 알려진 이 실험은 생각을 제한하거나 억제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더 자주 떠오른다고 해서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라고 부른다.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 구양봉은 결국 그녀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불태우고 사랑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자애인을 사랑한 건 구양봉뿐만이 아니었다. ‘황약사’ 역시 자애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황약사도 구양봉과 마찬가지로 상실의 아픔을 겪었는데, 아픔을 견디는 방식은 구양봉과 사뭇 달랐다. 구양봉이 자애인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고향을 떠났다면 황약사는 오히려 자애인 곁을 더 맴돌았다. 황약사는 자애인과 관계를 이어갈 구실을 만든다. 복사꽃 필 무렵이면 자애인을 만날 수 있기에 황약사는 복사꽃을 좋아하게 되었다. 자애인이 구양봉의 소식을 궁금해한다는 걸 알고 황약사는 주기적으로 구양봉을 찾았다. 비록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지언정 구양봉이 있는 한 황약사는 구양봉을 핑계 삼아 계속해서 자애인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은 상실을 경험하면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과 같은 심리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황약사는 ‘모용언’의 믿음을 저버렸다. 황약사를 사랑하고 있었던 모용언의 마음속에는 애증이라는 양가감정이 일어난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부정하고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황약사가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 모용언의 자아는 두 개로 분열되고 만다. 하나는 여전히 황약사를 사랑하는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황약사를 죽이려 드는 자아이다. 두 개의 자아는 갈등을 일으키며 서로 대립하는 지경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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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맹무살수’에게는 불행이 잇따라 닥친다. 아내가 외도를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된 맹무살수는 상간남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맹무살수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맹무살수는 복수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맹무살수는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연이어 비극적인 상황에 놓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불행은 보는 이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예상하지 않았던 난관에 부딪친 건 맹모살수뿐만이 아니었다. ‘홍칠’도 검객으로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홍칠은 구양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사정이 딱한 이를 돕는다. 마적대 무리와 싸우던 중 홍칠은 불의의 일격을 받고 손가락 하나를 잃는다. 뜻밖의 사고로 절망할 법도 하건만 홍칠은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손가락 아홉 개로 최고의 검객이 되고자 한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홍칠은 강호에서 뜻을 이루려면 가족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홍칠은 아내와 떨어져 지냈다. 하지만 손가락을 잃고 난 뒤 홍칠의 생각은 바뀌었다. 생각을 바꾸자 그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가 사라진다. 홍칠은 아내와 함께 강호에 나가기로 한다. 아내가 곁에 있다고 해서 영웅이 안 된다는 법도 없으니.

인간은 일생 다른 사람이나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상실감은 우리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겨 주어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같은 고통스러운 반응은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고 생명력 있게 살아가기 위한 정상적이고 건강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상실)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상실감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나타내 보이는 상실 이후의 반응이 그다지 별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영원한 것은 없다. 그게 무엇이든 언젠가는 없어지거나 사라지거나 변질되기 마련이다. 상실감은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