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카스테라
지은이 : 박민규
출판사 : 문학동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쓴 리뷰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화단에는 사자, 호랑이, 말, 코끼리 같은 동물 조각상이 있었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조각상이었는데, 당번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하교하는 날이면 왠지 그 모습이 을씨년스러워, 종종걸음으로 화단을 지나갔다. 그리고 곁눈질로 동물 조각상을 쳐다보곤 했다. 왠지 조각상이 살아 움직여서 나를 쫓아올 것만 같아서다.
나는 수능을 다시 보기 위해 고등학교에 재입학했다. 수능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더 좋은 대학교에 진학해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고등학교에 다시 온 건데, 나는 시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같은 반 아이들과 달리 나는 여전히 집합을 풀고 있다. 고구마 100만 개정도 먹은 듯 가슴이 답답하고 이러려고 고등학교에 다시 온 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는 뱃살로 고민을 하던 차에, 요즘 걷기 운동에 한창 심취해 있는 누나가 매일 만 보정도 걸으면 뱃살이 빠진다고 하기에, 좋다, 나도 한번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도 보고 새로 짓는 건물 구경도 하며 여유롭게 걸었지만 걸음 수가 점점 늘어나자 눈에 들어오는 건 사람들 신발뿐이었다. 걸으면서 여러 신발을 보았는데 그중에 레깅스를 입고 은색 신발을 신은 사람이 눈에 띄었다. 목적지였던 중고서점에 도착해서 책을 사고 올 때와는 다른 길로 걸어갔다. 되돌아올 때에는 다리에 힘이 빠지고 등 뒤로 땀이 줄줄 흘렀다. 버스를 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걷고 걷다 아까 봤던 레깅스를 입고 은색 신발을 신은 사람을 다시 만났다. 그 상황이 뭔가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평소와 다른 일이 일어나도 예삿일로 넘어가 버린다. 불이 활활 타오르거나 돼지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는 이상, 특이한 꿈을 꿔도 금방 잊어버린다. 하지만 소설가는 다른 거 같다. 소설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소설의 소재로 이용한다. 나였다면, 오늘 이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지나쳐 버렸을 일을, 소설가는 거기에 이런저런 살을 붙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소설가라면 내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토이 스토리>, 모든 것이 한낱 꿈에 불과했던 <파리의 연인>, 초대형 몰래카메라 <트루먼 쇼> 같은 작품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이 소설집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것처럼 적어 놓았다. 보통, 판타지적 요소가 있는 이야기들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날라치면 어떤 전조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는 아무런 예고 없이 비현실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사라졌던 아버지가 기린이 되어 나타나고, 오리배가 교통수단이 되고, 난데없이 헐크 호건이 나타나 헤드락을 건다.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동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이야기일 경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이야기에 나오는 동물, 사물, 인물이 어떤 이유로 등장하게 됐는지 알아야 작품을 제대로 읽은 거 같기 때문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나는 <카스테라>를 읽으며 작가의 의도를 1도 파악할 수 없었다. 현실 세계에서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이 벌어지니, 소설집 속에서 사람이 동물이 되고 장난감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대왕 오징어가 지구를 습격하는 일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소설의 주제 파악이 안 돼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데, 다행히 내용이 어렵지 않고 신선하고 기발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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