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톰보이(2011)
감독 : 셀린 시아마
출연 : 조 허란(로레 / 미카엘 역)
내 멋대로 쓴 <톰보이> 리뷰
예전에 조카가 머리가 긴 남자를 보고선, 저 사람은 남잔데 왜 머리가 기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머리 길이는 취향의 문제라 남자도 얼마든지 머리를 기를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조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도 조카는 나에게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다. 조카는 인형을 가지고 역할 놀이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누나는 조카의 취향을 반영해 미미 인형을 사주었다. 미미는 누구나 알다시피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만화 같은 이목구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비정상적인 비율의 몸매…
조카는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여성의 이미지를 스스로 정립해가고 있었다. 어린이집에 다닐 무렵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치마를 입고 다녔고, 라푼젤처럼 머리를 기르고 싶어 했고, 파란색 옷은 입지 않았다. 조카가 여자아이라 본능적으로 예쁜 것들에 끌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하고, 바지를 입어야 하며, 화장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은 거 같다. 조카가 즐겨 보는 방송, 동영상 플랫폼에선 조카의 상식에 부합하는 남자만 나오니까.
활달하고 남성스러운 여성, 특히 10대 여자아이를 가리켜 톰보이라고 한다. 나무위키에서 톰보이의 뜻을 찾아보았더랬다. 더불어, 서양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인 Tom에 소년이라는 뜻의 Boy가 붙어서 그 단어가 만들어졌다는 재미있는 어원도 알게 되었다. <톰보이>의 ‘로레’는 제목 그대로 톰보이다. 겉모습만 봐서는 로레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다. 더군다나 이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아서 더더욱 성별을 분간하기 어렵다. 로레의 말투나 행동거지만 보면 영락없이 남자다.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니다. 실제로 로레는 남자 행세를 하고 다닌다. 그런 로레를 또래 친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남자로 받아들인다. 여자아이로 추정할 외적인 특징이 없는데 어떻게 로레를 여자로 생각하겠나. 내 조카라면, 저 언니는 왜 저래, 라고 말했을 것이다. 로레는 확실히 조카와 다르다. 한때 조카는 샤랄라한 스커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하지만 로레라면 그런 스커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사줘도 바로 옷장으로 직행했겠지. 나는, 동생이 로레를 언니라고 부르니까, 그제야 로레가 여자인가 보다 한다. 여느 여자아이와 다른 외양, 성격이 로레를 톰보이로 만든 걸까. 로레는 점점 남자를 닮아간다.
로레네 가족은 새로운 마을로 이사했고 학교는 아직 개학 전이다. 로레가 여자인 걸 아는 사람은 가족 말고 아무도 없다. 로레가 남자처럼 하고 다니기 딱 좋은 상황이다. 로레는 남자 무리에 녹아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구경만 하다가 남자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축구를 하게 된 날. 같은 편 남자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웃통을 벗고 축구를 한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결국 로레도 윗옷을 벗어 던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남자아이들과 함께 공터를 누빈다. 어떤 아이는 축구를 하면서 수시로 바닥에 침을 찍 뱉는다. 로레는 그 모습이 남자의 전형이라도 된다는 듯, 비판 없이 그 행동을 수용한다.
하지만 로레의 남자 따라 하기는 남녀의 신체적 차이 때문에 제동이 걸리고 만다. 한바탕 공을 차고 난 뒤 쉬는 시간.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의 눈을 피해 대충 등을 돌리고 서서 거리낌 없이 볼일을 본다. 하지만 로레는 차마 그것까지 따라 할 수 없다. 서서 볼일을 볼 수도 없거니와, 그랬다간 정체가 탄로 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친구들과 같이 수영하러 갈 일도 생긴다. 원피스 수영복은 반으로 자르면 그만인데 문제는 수영복 속이다. 너무 밋밋한 게 걱정이었던 로레는 동생이 가지고 놀던 클레이 점토를 적당한 크기로 뭉쳐 넣는 걸로 위기를 모면한다.
나는 로레의 성 정체성을 섣불리 재단하고 싶지 않다. 단지 로레는 남자에게 좀 더 동질감을 느꼈던 거뿐이라고 생각한다. 로레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겉모습, 취향이 또래 여자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로레에게 일차원적인 관심을 표했을 것이다. 처음 한두 번은 괜찮지만, 그런 관심이 지속해서 이어지면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로레 입장에서는, 자신이 여자인 걸 알고 사람들이 나타낼 불편한 반응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남자인 척하는 게 속 편했을 수도 있다. 남자들 틈바구니에 있으면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아무리 남자를 따라 해도 결국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로레는 그 차이를 깨닫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갈 것이다. 나는 꼭 여자는 여자답고 남자는 남자다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강요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세상을 둘로 나눠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 그 틈에 로레가 설 자리는 없다. 인간은 오랫동안 정해진 성역할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개개인의 삶을 옥죄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 세상은 더욱 다채로워질 것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로레는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진짜 친구를 만난다. 그 아이의 이름은 ‘리사’이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양연화] 가슴 아픈 이별은 미련이 남는다 (1) | 2023.01.04 |
---|---|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0) | 2022.12.22 |
[콘택트] 다른 행성에도 사람이 살까요? (0) | 2022.12.05 |
[천하장사 마돈나] 나는...그냥 살고 싶은 거야 (0) | 2022.11.28 |
[장르만 로맨스] 설득력이 부족한 그들의 로맨스 (0) | 2022.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