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국의 아이들] 가난은 아이를 일찍 철들게 한다.

iambob 2023. 4. 2. 17:27

제목 : 천국의 아이들 (1997)
감독 : 마지드 마지디
출연 : 아미르 파로크 하스미얀(알리 역), 바하레 세디키(자라 역)



내 멋대로 쓴 <천국의 아이들> 리뷰

네가 걱정할 게 뭐가 있냐. 어른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근데 아이라고 걱정이 없을까.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나름 걱정거리가 많았던 거 같은데… 얼마 전 조카의 학교에 구경을 갔던 적이 있다. 나는 조카랑 같이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1학년 교실이 유치원처럼 꾸며져 있는 걸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즘 학교는 학생을 배려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나 때는 그런 게 어디 있었나. 학교는 있는 정도 떨어지게 생겼고 교실은 아이들로 북적댔다. 학교는 도저히 적응하려야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기 싫었지만, 그 말을 부모님께 꺼낼 수 없었다. 학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만 하는 곳이었고, 괜한 말을 해서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난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딱히 뭘 해서라기보다 불규칙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좋았다. 방학 때는 매일 늦잠을 자고 밤늦게까지 TV를 봐도 부모님이 잔소리하지 않았다. 방학은 나에게 해방감을 안겨줬다. 하지만 개학이 다가옴에 따라 압박감이 점점 커졌다. 미루고 미뤘던 방학 숙제가, 방학이 끝나간다는 아쉬움과 함께 내 마음을 내리눌렀다. 틈틈이 숙제를 해뒀더라면 발등에 불이 떨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그 당시 나는 순간의 행복이 더 소중했다. 빗금으로 가득 찬 시험지를 받아 드는 것보다 내 자유를 속박하는 숙제가 더 걱정거리였던 때가 있었다.

걱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학년 초, 어떤 담임 선생님과 친구를 만날지도 걱정이었다. 혹시나 무서운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이 되지는 않을까, 반 분위기를 흐리는 아이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3월 한 달을 보냈다. 나는 학년이 바뀔 때, 친했던 친구와 같은 반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늘 친구를 새로 사귀어야 했다. 내향적인 편이어서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던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 주길 바라며 우두커니 자리에 앉아 칠판만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 특히 걱정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을 텐데 나만 혼밥 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어색하고 민망한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무슨 복인지 항상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걱정을 한시름 놓았다.

어른은 아이에게 네가 걱정할 일이 뭐가 있냐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이들도 걱정거리가 많을 것이다.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 어른이 모르는 것일 뿐. <천국의 아이들>에는 속 깊은 두 남매 ‘알리’와 ‘자라’가 나온다. 알리는 심부름을 하던 중 동생의 하나뿐인 구두를 잃어버리고 만다. 알리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님께 혼나는 건 둘째 치고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새 구두는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리네 집은 몇 달 치 집세가 밀릴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상황이 그런데 부모님에게 동생의 구두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겠는가.  자기 때문에 동생이 곤란을 겪을 걸 생각하니, 알리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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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와 자라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으면서 위기를 모면할 방법을 찾는다. 그들이 고군분투를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기특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가슴 뭉클하기도 한다. 남매는 알리의 운동화를 번갈아 신기로 한다. 자라는 오빠에게 운동화를 주기 위해 학교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린다. 알리는 학교에 늦을까 조바심하며 동생을 기다린다. 자라가 헐레벌떡 뛰어와 신발을 벗어주면 알리는 서둘러 신발을 바꿔 신고 황급히 학교로 뛰어간다. 발바닥에 불이 나게 달리고 달려도 알리는 지각을 면치 못한다. 자라는 헐거운 운동화를 신고 달리다 그만 운동화를 도랑에 빠뜨려 운동화를 잃어버릴 뻔한다.

운동화 돌려 신기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까지고 운동화를 공유할 순 없는 노릇이다. 매일 뜀박질하느라 남매가 점점 지쳐갈 때쯤, 자라는 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자기 신발을 신고 있는 걸 발견한다. 하굣길, 자라는 조용히 그 아이의 뒤를 밟는다. 그런데 사정이 딱한 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라는 신발을 포기하기로 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불우한 이웃을 도우라고 배운다. 근데 내 코가 석 자라면 남의 코 걱정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어렸을 때 연말연시 불우이웃 돕기 ARS 전화 모금에 적극 동참했다. 근데 나이가 든 뒤로는 더는 그 전화를 걸지 않는다. 지금 내 상황이 남의 어려움을 살필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애써 그들의 딱한 사정에 눈감는다. 앞뒤 재지 않고 남을 도우려던 착한 마음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알리에게 신발 돌려 신기를 끝낼 기회가 찾아온다. 지역에서 마라톤 대회가 개최되는데 3등 상품이 운동화였던 것. 알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동생의 신발 분실을 계기로 매일 같이 뜀박질을 해야만 했던 알리는 본의 아니게 달리기의 기본기를 다지게 되었다. 이제 대회에 나가 3등만큼의 노력만 기울이면 될 터. 그런데 선두 경쟁이 생각보다 치열하다. 선두 무리가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자칫 3등만 노리다간 3등마저 빼앗기게 생겼다. 결국 알리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냈고 계획과 달리 1등을 하고 만다. 알리는 1등을 하고도 마냥 기뻐할 수 없다. 운동화를 받지 못해 실망할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천국의 아이들>의 알리와 자라 남매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 아빠의 벌이가 시원찮은 탓에 집안 형편은 늘 군색하고 엄마는 허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하다. 집에는 막둥이 아기까지 있다. 두 남매는 어쩔 수 없이 집안 분위기를 살피고 집안일을 돕고 막내를 보살핀다. 아이는 나이답게 자라야 한다는데 알리와 자라는 아이답게 클 기회를 빼앗긴다. 이 영화에는 부잣집 아이와 좋은 운동화를 신고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모습은 두 남매와 대조를 이룬다. 경제적 빈곤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주곤 한다. 그리고 어른 몫의 걱정까지 아이에게 전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