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iambob 2025. 3. 6. 11:40

제목 : 작은 땅의 야수들

지은이 : 김주혜

출판사 : 다산책방



<작은 땅의 야수들> 리뷰

팔자가 기구하다는 건 <작은 땅의 야수들> 속 등장인물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린 시절 ‘옥희’는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옥희의 어머니는 돈 몇 푼을 받고 옥희를 기방에 의탁했고 옥희는 기방의 견습생이 되었다. 당시 옥희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기방의 견습생이 되지 않았다면 몇 년 안에 변변찮은 남자에게 팔려 가듯 결혼하게 될 게 뻔했다. 옥희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기생이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기방에서 어머니에게 내준 돈은 일종의 투자비였다. 나중에 갚아야 할 돈이었지만, 그 돈만 있으면 옥희네는 그 돈을 종잣돈 삼아 희망을 품고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옥희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다. 옥희는 기방에서 숙식하며 기예를 익혔고 마침내 기생이 되었다.

옥희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온 건 어느 자선 공연에서였다. 옥희가 공연에서 선보인 칼춤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녀의 무대를 눈여겨 본 극단의 연출가는 옥희에게 입단 제의를 하였다. 옥희는 배우가 되어 예술가처럼 살아갈 날을 꿈꿨다. 옥희는 연출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극장의 전속 배우가 되었다. 이윽고 무성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옥희는 스크린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옥희는 배우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성공의 불씨는 너무 빨리 사그라들었다. 불경기가 찾아왔고 일제의 수탈과 착취는 날로 심해져 갔다. 영화 산업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재편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옥희의 영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옥희는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작사까지 파산하면서 옥희의 일거리는 뚝 끊기고 만다. 옥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옥희는 혹독한 가난과 고난의 시간을 거쳐 해방을 맞이했다. 이제 옥희가 한때 배우로 활동했었다는 걸 아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해방 후 옥희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예술학교에서 전통 무용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말년에는 그마저도 관두고 제주도로 내려가 해녀가 되었다.

 

300x250

 

‘정호’는 어린 시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혈혈단신으로 상경했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거지 패거리에 들어갔다. 정호는 행동이 기민하고 민첩한 데다가 본능적인 직감이 뛰어나 단번에 패거리의 왕초가 되었다. 패거리는 점점 세를 불려 동네 가게에서 보호비를 받는 조직폭력배로 발전하였다. 정호에게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그 여자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었다. 힘없는 상인들 등쳐먹고 사는 건 아무래도 면이 서지 않았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건지려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했다.


마침, 세상이 좌우로 나뉘어져 있었다. 동네 가게가 아닌 특정 진영을 보호해 준다면 남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고 예전보다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 정호는 좌파의 거물급 인사인 ‘명보’를 찾아간다. 정호는 사상과 이념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소중한 사람과 함께 소박한 삶을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그랬던 정호였지만 명보와 대화를 나누면서 점점 그에게 교화되어 갔고, 결국 명보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까막눈이었던 정호는 명보 밑에서 수학하며 독립투사의 자질을 쌓았다.

마침내 대의를 행할 날이 찾아왔다. 정호에게 주어진 임무는, 만주국을 순방 중인 일본 부총독을 암살하는 것. (486쪽) 정호는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임무를 완수해 냈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1944년, 일본군은 패색이 완연했지만, 일본의 인적, 물적 수탈은 날로 악랄해졌다. 중국에서 돌아와 스승의 집으로 향하던 정호 역시 서슬 퍼런 순사의 눈에 띄어 강제 징용을 당할 뻔했다. 하지만 천우신조로 전장에 끌려가지 않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정호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자 새로운 공화국이 정호의 과거를 문제 삼았다. 우파 정권은 정호를 공산주의와 간첩 혐의로 기소하였다. 정호는 끝내 구치소에서 풀려나지 못했다. 그는 누명을 벗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그동안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서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득히 먼 옛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이 땅의 사람들은 여전히 격변과 혼돈을 겪고 있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발버둥 치지 않으면 세상에 잡아먹히기 일쑤이다. <작은 땅의 야수들>에는 옥희, 정호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언제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세상살이는 만만찮다. 그들의 이야기를 허투루 보아 넘길 수 없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