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타인의 삶 (2006)
감독 :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출연 : 울리히 뮈에(하우프트만 게르트 비즐러 역), 세바스티안 코치(게오르크 드라이만 역), 마르티나 게덱(크리스타 마리아 질란트 역)
<타인의 삶> 리뷰
<타인의 삶>과 <존 말코비치 되기>는 비슷한 점이 있다. 두 영화 모두 타인의 삶을 훔쳐본다는 것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훔쳐보기는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 속 사람들은 관음증적으로 타인의 삶을 훔쳐본다. <타인의 삶>은 엄밀히 말하면 훔쳐 듣기인데, 이 영화에서 훔쳐 듣기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비즐러’는 연재소설의 다음 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타인의 삶을 엿듣는다. 상상력은 비즐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비즐러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타인의 삶에 빠져들면 들수록 비즐러는 점점 타인의 삶에 동화되어 간다.
비즐러는 도청 전문가이자 베테랑 심문관이었다. 비즐러는 인정 없고 냉혹하게 사람을 심문했다. 그에게 심문을 받은 사람은 없는 죄도 만들어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국가안전보위성 슈타지는 비즐러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바로 문화 예술계의 거물 ‘드라이만’을 감시하도록 한 것. 슈타지는 드라이만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회 체제에 위협을 가할 거로 생각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었고 혐의자를 탈탈 터는 데 일가견이 있었던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감시하는 데 적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비즐러의 진두지휘 아래 드라이만은 24시간 감시를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드라이만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그런데 비즐러는 어째서 드라이만의 삶에 빠져들게 되었을까. 드라이만은 연인 ‘질란트’와 동거 중이었다. 드라이만은 유명한 극작가였고 질란트 역시 유명한 연극배우였다. 사람들은 유명 인사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 별 관심이 없었는데도 유명인이라고 하면 괜히 궁금증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비즐러는 공적인 임무를 핑계로 당대 최고의 유명인이라 할 수 있는 드라이만과 질란트의 사적인 영역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드라이만의 꼬투리를 잡는 게 감시의 목적이었지만, 그들의 사생활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비즐러는 두 남녀의 사랑이 눈에 밟혀서 점점 해야 할 일을 망각한다.
비즐러가 두 남녀의 사랑에 사로잡히게 된 데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슈타지는 1950 ~ 1990년 동독 시민들의 '공적 영역'은 물론, 내밀한 사생활까지 들여다봤다. 전화 감청, 도청 장치 및 몰래카메라 설치, 주변 인물을 통한 탐문, 직장 · 주거지 수색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감시 활동에 투입된 공식 요원만 9만여 명, 비공식 요원은 동독 역사 40년간 60만 명 이상으로 파악된다. 친구, 은사, 직장 동료, 이웃 등 '평범한 사람들'이 슈타지에 정보를 제공했다. # 한국일보 서로를 감시하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의심해야 하는 세상에서 애정과 신뢰로 가득한 인간관계를 맺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비즐러는 사람을, 더 나아가 사랑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질란트를 지켜보며 파괴되어 버린 인간관계가 회복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듯하다. 비즐러는 그들의 사랑이 궁금해졌고, 응원하게 되었으며, 지키고 보호하려고 한다. 그들의 사랑은 회색빛 세상에 스며든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러나 그 사랑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사랑의 불씨가 꺼지려고 할 때면 비즐러는 풀무질해서 그 불씨를 되살렸다. 하지만 비즐러의 행동은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조직이 하려는 일에 훼방을 놓는 것과 같았다. 이는 그의 신변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마저 위태롭게 했다. 하지만 비즐러는 자기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의 사랑이 비즐러의 가슴에 온기를 채워 주었기 때문이다.
비즐러에게 감시를 의뢰한 사람들은 사실 검은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다. 그런데 비즐러가 몸담은 세상엔 그런 사람만 있었던 게 아니다. 드라이만 같은 사람은 동료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알았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 드라이만의 온기는 까닭 모를 이유로 비즐러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비즐러는 타인의 삶에 동화되었다. 비즐러는 자신에게 전해진 마음의 온기가 오래오래 지속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며 자기가 보고들은 걸 함구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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