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칠드런 오브 맨] 샨티, 샨티, 샨티

iambob 2022. 7. 18. 00:05

제목 : 칠드런 오브 맨 (2006)
감독 : 알폰소 쿠아론
출연 : 클라이브 오웬(테오 역)



내 멋대로 쓴 <칠드런 오브 맨> 리뷰

그동안 봐왔던 디스토피아 영화는 대체로 핵폭발, 환경오염, 인공지능으로부터 비롯된 암울한 미래를 그린 게 많았다. 배알이 꼴리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으름장 놓는 나라가 있고, 이상 기후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고, AI 기술이 인간의 실생활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앞으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날 것만 같아 섬뜩한 기분이 든다.

나는 재앙이라고 하면 보통 핵 재앙, 기후 변화, 천재지변 등을 떠올렸지, 저출산이 재앙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임신과 출산은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 육아를 원치 않는다면 굳이 아이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아기를 낳고 기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합계출산율을 보면 단순히 여길 문제가 아닌 듯하다. 2020년 기준, 한국의 가임여성은 평생 1명이 채 안 되는 0.837명의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 한국은 태어나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아서 인구 소멸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주변을 둘러보면 사람이 차고 넘쳐서 저출산의 심각성이 그렇게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저출산이 당장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인구 감소가 본격화하면 여기저기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우선 일할 사람이 줄어들어 경제에 타격을 줄 것이고,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지방은 소멸할지도 모르며, 고령화로 인해 늘어난 복지 비용을 미래 세대가 온전히 떠안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아예 태어나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겠지.

<칠드런 오브 맨>은 더 이상 새 생명이 태어나지 않는 2027년을 그리고 있다. 18년 전 태어난 ‘디에고’를 끝으로 세상엔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다. 지구에서 제일 어렸던 디에고가 불의의 사고로 죽자, 뉴스는 앞다퉈 그 소식을 전하고 사람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 뉴스를 시청한다. 아이들이 사라진 거리는 온통 회색빛이다. 도시 여기저기서는 심심찮게 테러가 일어나고,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불법 이민자들은 새장 같은 곳에 갇혀서 울부짖고 있다. 심지어 전광판에는 자살을 권하는 광고가 흘러나온다. 주인공 ‘테오’가 사는 세상은 희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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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인류의 대가 완전히 끊긴 줄 알고 살아가는데, 불법 이민자 ‘키’가 임신하면서 그녀를 둘러싼 알력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차여차 테오는 흑인 소녀 키를 휴먼 프로젝트에 데려다줘야 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휴먼 프로젝트는 인간 멸종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 과학자 단체이다. 테오는 키를 휴먼 프로젝트의 배 내일호에 무사히 승선시키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테오와 키의 모습을 눈으로 좇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그들의 험난한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칠드런 오브 맨>은 관객에게 색다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롱 테이크로 찍은 전쟁 신은 마치 비디오 게임을 보는 거 같다. 게임은, 카메라가 캐릭터의 뒷모습을 비춘다. 캐릭터 뒤통수를 찍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구도가 적을 보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시선으로 게임 속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 이 영화는 4DX 영화관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거 같은 몰입감을 준다. 원 테이크로 찍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카메라 구도도 그런 느낌을 주는 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테오가 키와 아기를 보호하며 총격전이 벌어지는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은 지극히 종교적이다. 인류의 희망을 마주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길을 터주며 아기를 거룩하고 신성하게 쳐다본다. 그 순간만큼은 전쟁의 포성도 잠시 멈춘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는 건 늘 십 대 청소년들이다. 그걸 보면서 어른은 뭐 하느라 애들을 사지로 내모나, 그런 생각을 했다. 십 대 주인공의 어깨에 큰 짐을 지운 이유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함일 수도 있고, 인류가 처한 문제의 해답을 아이들에게서 찾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사람들이 테오 일행을 쳐다보며 길을 터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새 생명이 인류가 처한 위기를 해결해주길 간절히 바랐던 건 아닐까.

봄은 아이처럼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아이의 웃음이 사라진 세상은 겨울처럼 삭막하기 그지없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 암울하다. 무거운 생각은 내 마음을 짓눌렀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듣게 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무거운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게 아이들이 가진 힘인 거 같다. 언젠가 스트레스로 눈살을 찌푸리던 엄마는 조카의 재롱을 보고 한마디 했다. “그래도 너 때문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