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 북] 백인 같은 흑인과 흑인 같은 백인의 이야기

iambob 2022. 9. 5. 13:57

제목 : 그린 북 (2019)
감독 : 피터 패럴리
출연 : 비고 모텐슨(토니 발레롱가 역), 마허샬라 알리(돈 셜리 역)



내 멋대로 쓴 <그린 북> 리뷰

왠지 1960년대 미국의 흑인은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며 궁핍하게 살았을 거 같고 백인은 정반대의 삶을 살았을 거 같다. 이건 미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다. 옛날엔 지금보다 인종차별이 심했을 테니 흑인은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데 제약이 많았을 거 같고 백인은 인종차별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좋은 일자리를 독차지했을 거 같다. 근데 나는 왜 반대인 경우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그동안 미디어에 그려진 흑인의 모습이 그러해서 이런 생각이 굳어진 걸까…

내 선입견은 심각한 왜곡을 초래한다. 1960년대가 아무리 인종차별이 심했다고 할지라도 모든 흑인이 가난하고 모든 백인이 부유할 리 없지 않은가. 나는 미디어에 비친 흑인의 모습만 보고 흑인 사회 전체가 가난할 거라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린 북>은 그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 준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흑인들은 그동안 미디어에서 익히 봐왔던 대로 웨이터, 농부, 집사, 배관공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돈 셜리’는 카네기 홀 꼭대기에 사는 성공한 피아니스트이다.

내가 가진 편견을 깨뜨려 버려서 그랬던 걸까. 카네기 홀 건물 꼭대기에 사람이 산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당시 흑인이 흑인 집사를 뒀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타인의 시간과 노동력을 돈으로 사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임금노동자가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돈을 벌고 있을 테니까. 돈 셜리는 피아노 연주에 집중하기 위해 직업 외적인 일을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일을 해줄 사람으로 ‘토니 발레롱가’를 고용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비정상적인 일이 되어 버린다. 돈 셜리는 연예인처럼 매니저와 함께 일했을 뿐이다. 근데 인종차별이 심했던 1960년대라는 시대 배경이 머릿속에 주입되는 순간 그 광경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한다. 돈 셜리가 흑인의 시중을 받고 백인 매니저를 두는 건 기존에 내가 가졌던 생각과 배치되는 것이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린 북>은 인종차별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히면 합리적인 사고를 저해한다는 걸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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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피아니스트가 백인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전국 투어를 떠나는 모습이 나만 생경했던 건 아닐 테다. 돈 셜리는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에게서조차 이방인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는 성공한 피아니스트지만 주류 사회는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고달픈 삶에 지친 흑인 농부들은 그를 마치 다른 세상 사람 보듯 한다. 게다가 그는 성소수자이다. 어느 사회에도 속할 수 없었던 돈 셜리는 이렇게 말한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으면… 난 대체 뭐죠?”

자신이 남들과 다름을 느낄 때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타국에서 태어났지만, 생김새, 피부색이 달라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는 이민자 2세의 이야기를 언젠가 TV에서 본 적 있다. 겉모습은 한국인이지만 타국의 사고방식을 가졌던 그들은, 자신이 한국인도 그렇다고 그 나라 사람 같지도 않다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자신이 어떠한 사회에도 끼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편할 수 없다.

몸속에 바이러스나 세균 같은 것이 들어오면 우리 몸은 항체를 생산해서 병원을 몰아낸다.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건 어찌 보면 본능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그런 사람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편견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한 기분이 들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태어난 걸 어떻게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니까.

실력은 쌓으면 되지만 피부색, 성 정체성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우리를 좌절하게 만든다. 백인답지도 흑인답지도 남자답지도 않은 돈 셜리는 그래서 괴롭다. 토니 발레롱가는 그런 돈 셜리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준다. 백인 같은 흑인과 흑인 같은 백인은 투어를 같이 다니면서 서로의 차이를 서서히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