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알맹이가 빠진 사랑

iambob 2022. 10. 3. 17:43

제목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1995)
감독 : 마이크 피기스
출연 : 니콜라스 케이지(벤 역), 엘리자베스 슈(세라 역)



내 멋대로 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리뷰

새겨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술병에는 이런 경고문이 적혀 있다.

경고 : 지나친 음주는 간경화나 간암을 일으키며, 운전이나 작업 중 사고 발생률을 높입니다. 또한, 알코올 중독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뭐든 정도가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은 알코올 중독자다. 벤은 술을 물처럼 마신다. 저렇게 마시다간 죽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술병에 걸려 죽는다. 간경화나 간암에 걸렸으려나.

이 영화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난다. 별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때 잘나갔던 시나리오 작가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파멸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는 술을 못 마신다. 그래서 술로 고통을 잊으려는 이 남자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계속 술을 마시는 벤을 보고 있자니 나중에는 내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이 영화의 의도가 술로 인해 사람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라면, 그 목적에 제대로 부합한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실제 알코올 중독자를 보는 거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벤은 무슨 일을 겪었기에 자기 삶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걸까. 자해는 자기 몸을 스스로 다치게 하는 걸 말한다. 벤은 술이 건강을 해친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몸에 술을 들이붓는다. 벤의 과도한 음주는 자해 행위에 가깝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술에 취해 잠든 벤은 아들을 애타게 부르다 잠에서 깬다. 벤은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라도 남긴 걸까. 벤이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게 있다면 그의 자해 행위에는 속죄의 뜻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거 같다. 자신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므로 목숨을 저당 잡히고 자기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다. 벤은 술로 자신을 벌하는 동시에 자신의 죄가 씻겨나가길 바랐던 건 아닐까. 꿈보다 해몽이다.

아니면 벤은 술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뭣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 결국 술에 빠져버린 것이다. 술에 자신을 가둬버린 자의 결말은 비참하다. 벤은 맨 정신으로는 은행에서 돈을 찾을 수도 없고, 어딜 가나 말썽을 빚는 통에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술에 의존하면 할수록 벤의 삶은 피폐해 간다. 술에 잠식당한 벤은 결국 가족, 직장, 재산, 건강 등 모든 걸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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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의 마음도 공감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알코올 중독자를 가까이해서 얻을 이점이 별로 없을 거 같은데도 세라는 굳이 벤을 곁에 두려고 한다. 세라는 일종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걸로 볼 수도 있다. 죽어 가는 벤을 돌봄으로써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세라는 벤에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벤이 떠나지 않고 그녀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점점 지쳐간다. 벤이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세라 주변에는 무언가를 강요하는 사람밖에 없었다. 세라는 악덕 포주 ‘유리’를 피해 라스베이거스로 도망쳤다. 그런데 유리는 기어이 세라를 찾아내 그녀를 성 착취를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몸을 파는 직업 특성상 손님을 응대할 때 자발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세라는 손님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그들의 요구에 맞춰 연기를 해야 한다. 그에 반해 벤이 바라는 건 딱 하나,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세라 입장에서 벤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벤에게 끌렸을지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유리한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세라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게다가 사람들은 세라에게 육체적 관계만을 원한다. 아마도 세라는 오랜 시간 착취당하면서 마음속에 공허함이 점점 커졌던 거 같다. 사람한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고치는 게 바람직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세라는 벤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던 거 같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세라는 상처가 치유된 거 같진 않다. 알코올 중독을 고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나.

상처로 뒤범벅된 두 사람의 관계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거처럼 위태롭다. 벤과 세라는 이해관계가 다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겉돈다. 벤은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해 보이고, 세라는 정서적 안정을 원하는 거 같다. 겉으로 봤을 때, 벤과 세라는 보통의 연인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사랑엔 알맹이가 빠져 있다. 둘 사이에 정서적 교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사랑을 한 건지, 연민을 느낀 건지 헷갈린다.